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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부정공>정헌재중수기(靖獻齋重修記)
靖獻齋重修記 建置齋舍于先墓之側乃古制也亦爲通例己久矣惟吾 副正先祖虔谷先生之禮葬幽宅在湖南昇州郡住岩面住洞舟峙山脈乙坐之原其下齋舍名以靖獻盖取 先生獻靖于舊君之意也但世傳文屢屢因兵燹頗多泯滅是齋之創建與夫歷世幾回重修之年紀無從可詳惟是斯齋之定礎時期逆推概算距今宜爲五百餘禩何者禮葬與旌閭之擧在前朝 世宗年間之故也至若斯齋之創拒由於子孫歟抑由國力歟余窃嘗意謂禮葬之日勢應一時共擧不意始見望友述庵宋公在晟之十餘年前所作齋記亦照此意何其偶然一致如是耶然斯屬瑣論姑留徐究恭惟 先生以麗朝喬木世臣忠孝兼至遭遇王李易姓之際固守罔僕之志優佔杜門諸賢之一其靖忠高節可與首陽山月能爭其輝矣爲其雲仍者每歲薦祀之前日濟濟多士齊集此齋以齋明盛服待備籩豆之獻講磨以身忠孝成敎於世家之遺法相勵以遵守勿墜幷慕 先生之陟降精靈如在上下左右則神可以格思可以享思授之以永嘏哉輓近齋字與門墻多圮敗勢不容緩乃宗議允協鳩財募工始工於檀紀四三○一(西紀一九六八)年戊申 月 日竣工于四三一三(一九八○)年庚申 月 日概據來聞齋于與門墻不惟煖美如新並新建直舍又長拓通墓之車路僉君宗子之積歲賢勞可謂至矣胡不賛謝歟盖是役也尸之者東冑洪鏶湘龜東點熙善僉宗也來請文者東貴允祚東潤僉宗也辭之不獲畧構蕪辭請以是爲記 檀紀 四三一三(西紀一九八○)年 庚申 七月 日 後孫 大韓民國 前臨時政府 國務委員 擎韓 謹記 정헌재중수기(靖獻齋重修記) 재사(齋舍)를 선묘(先墓)의 곁에 건치(建置)한 것은 곧 옛 제도요 또한 통예(通例)가 된 지 이미 오래이다. 생각하오니 우리 副正先祖 虔谷先生의 예장(禮葬) 유택(幽宅)을 湖南 昇州郡 住岩面 住洞 舟峙山脈 乙坐之原에 모시고 그 아래 재사의 이름을 靖獻으로 한 것은 대개 先生이 구주에게 헌정한 뜻을 취한 것이다. 다만 대로 전하던 문헌이 자주 당한 兵火로 자못 많이 민몰되어 재각의 창건 및 重修를 몇 번 했는지 그 年紀를 알 수 없고 오직 齋室의 정초(定礎) 時期를 역추개산(逆推概算)하면 五百餘年이 되었다고 하겠다. 이유인즉 禮葬및 旌閭의 포양(褒揚)이 世宗年間에 擧行된 총전(寵典)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 재각을 子孫의 힘으로 창건했는지 國力으로 했는지 자상치 못하나 불초는 禮葬을 모신 날에 一 時並擧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뜻밖에 망우(望友) 술암(述庵) 송공재성(宋公在晟)이 十餘年前에 지은 재기에도 이 뜻을 비쳤으니 어찌 이와 같이 우연 一致가 되는지 공숙하게 생각하니 先生은 麗朝 喬木世臣으로 忠孝가 兼至하셨는데 王李易姓의 때를 만나 굳이 罔僕의 志節을 지켜 두문제현(杜門諸賢)의 一人이 되셨으니 그 정충고절(靖 忠高節)은 가히 首陽山달로 더불어 능히 그 빛을 다툴 것이다. 그 후손 된 자 매년 세 一제를 모실 때에 위의제제(威儀濟濟)한 많은 선비가 이 재실에 모여 깨끗이 재계하고 성장한 예복으로 제수를 갖추어 奉獻하고 또 忠孝를 강마하여 世家의 遺法으로 成敎하고 서로 힘써 遵守하며 아울러 先生의 오르고 내리심을 追慕하면 정령(精靈)이 左右에 계신 것 같이 神이 가히 이르러 흠양하시고 영원한 복을 주실 것이다. 근래에 재실과 門墻이 퇴락되어 연타할 수 없는 형편임으로 宗議가 允協하여 재물을 모으고 工匠을 불러 檀紀四三○一(西紀一九六八)年 戊午 月 日에 착공하여 四三一三(一九八○) 庚申 月 日에 준공하였다. 대개 청문한 바에 의거하면 齋宇 및 門墻이 새롭고 빛날 뿐 아니라 西齋와 直舍를 新建하였고 또 車道를 新設하였으니 여러 宗人의 賢勞를 어찌 賛謝 아니 하겠는가 이 役事를 주장한 자는 東冑洪鏶湘龜東點熙善僉宗이요 請文者는 東貴允祚東潤也 사절치 못하고 대략 蕪辭를 얼거 재기로 함. 檀紀 四三一三(西紀一九八○)年 七月 日 後孫 大韓民國 前臨時玫府 國務委員 擎韓 謹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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